ESSAY

교대 탈출하기

을복씨 2022. 10. 11. 10:01

 교대에 오고 싶지는 않았지만, 차마 부모님께 1년 더 재수를 해보겠다고는 말씀드릴 수 없었다. 죄송스럽기도 했고 나이도 적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1년을 더 그 고생을 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너무 지쳐있었고 수능에도 중독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냥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 그렇게해서 다닌게 벌써 2년이 되어간다. 이 2년동안 난 너무 힘들었다.

 

 늦은 나이에 들어오기도 했고 항공대 입학에 실패해서 이곳에 온 것이니 그것을 만회하고자 열심히 살았다. 그만두었던 헬스도 꼬박꼬박가고 학원에 과외에 근로에 알바도 3개씩 했으며 공부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취를 했기때문에 생활비의 지출이 너무 커져서 일은 일대로 했지만, 매번 돈이 부족하여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매 순간 돈에 대한 압박이 너무나 크게  느껴졌다. 거기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붓으로 그려보기, 피아노 쳐보기 등 초등학생들이 할 만한 것을 배우고 있었다. 친구들은 이제 하나 둘 졸업하고 열심히 스펙을 쌓아 취업에 성공하고 있었는데, 학교에서 그런 것들을 하고 있자니 심적으로 견딜 수 없었다. 물론 학교만 졸업하고 임용에 붙기만 하면 평생직장이 보장되는 것이지만, 내 적성과는 너무나 맞지 않았다. 나는 발전적이고 스펙을 쌓아 더 나은 곳으로 가고싶은 열망이 있었지만, 이곳은 너무나 안정적이고 잔잔했다. 그렇게 심적인 부담을 안고 매일매일을 바쁘게 살아가니 결국 번아웃이 와버렸다.

 

 처음 1년은 '새로움' 덕분에 버텼다. 알바라고는 최저시급을 받으며 몸 쓰고 사람 상대하는 일 밖에 하지 않았던 내가 교대학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선생님 대접을 받으며 최저시급의 2배, 3배 되는 돈을 받고 편하게 여름엔 시원한 에어컨 밑에서 겨울엔 따뜻한 히터 밑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학생들을 가르쳤다. 왜 사람들이 기를 쓰며 자격증을 따고 경력을 쌓는지 그제서야 이해가 갔다. 이런 타이틀 하나로 받는 대우가 달라지니, 그 전에 식당알바, 편의점 알바는 어떻게 했나 싶었다. 내 성격에도 딱히 문제가 있는 편이 아니라서 아이들과 곧잘 친해져 학생들도 날 좋아했다. 처음에는 채점알바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 이제 채점할 시간도 없어질 정도로 수업을 많이 맡게 되었다. 다른 선생님들이 예기치 못하게 쉴때 임시로 수업을 맡거나 원장님이 본인의 아들에게 수학 수업을 한번 해줄수 없겠냐는 부탁을 받고 몇 번 수업을 했는데, 반응이 좋아서 그 뒤로는 수업을 많이 맡게 되었다. 나중에 에타에 학원 대타를 구한다는 글을 올렸을때, 어떻게 이렇게 하냐는 반응이 있을 정도였다. 이때까지는 그래도 뿌듯함과 자존감이 오르는 것이 느껴져 힘들어도 큰 불만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학생들과 친해지고 수업도 매일 몇시간씩 하다보니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점점 지쳐갔다. 학생들의 문제는 아니었다. 아이들은 요새 뉴스나 기사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너무나 착하고 말도 잘 들었고 선을 지킬 줄 아는 녀석들이었다. 학원을 그만둔지 꽤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녀석들 생각이 날 정도이니. 물론 친해지면서 걸핏하면 놀자고 귀찮게 굴긴 했지만. 그래도 귀여운 정도였다. 내가 힘들었던 것은 수업이 수업같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학원에서는 학생들을 최대한 많이 받고 유지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나에게 성적의 향상보다는 재미에 초점을 맞추길 원했다. 한 번은 과학시간에 열심히 가르치고 나오는데, 원장님이 내 수업이 재미가 없다는 학생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유명 인강강사들의 영상을 떠올리며 더욱 열심히 가르쳤다. 목소리도 더 크게 설명도 더 자세하게 타이트하게 수업했다. 내심 뿌듯할 정도였는데도 원장님이 따로 불러서 똑같은 말씀을 해주셨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시진 않았지만 눈치껏 내가 알아듣게 재미에 초점을 맞춰달라고 하셨다. 

 

그 뒤로는 난 수업보다는 학생들의 재미에 초점을 맞췄다. 지루함을 느끼면 안된다는 부담감이 굉장히 커졌다. 그래서 수업 중간중간마다 아이들을 웃기기에 바빴다. 내가 수업을 하러온건지 놀아주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마치 수련회 mc가 된 것처럼 침묵이 유지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내 성격에도 맞지 않는 일을 하다보니 나중에는 거부감마저 들었고 수업을 정말 하기가 싫어졌다. 그래도 생활비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다녔다. 타이트한 스케쥴에, 일도 힘들고, 돈은 매번 부족하고, 타지생활에, 재수에 실패했다는 자격지심까지 1년은 어떻게든 버텼지만 2년이 되는 해 감당할 수 없는 번아웃이 왔고 4점을 넘기던 학점도 과에서 꼴찌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더 이상 버틸수가 없어 학원을 그만두고 한동안 일을 쉬었지만 충전되지가 않았다. 때마침 여름까지 와서 음식을 만들면 상하고 버리고 하는 일이 반복되자 음식도 만들어먹기를 그만두고 배달음식만을 시켜먹었다. 헬스장도 기간이 끝났는데 돈이 없어 연장하지 못해 그나마 날 지탱해주던 운동마저도 그만두니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집은 쓰레기로 넘쳐나고 취미로 키우던 물고기들도 관리를 안해 많이 죽고 시간이 나면 그냥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내가 드러머로 있던 밴드팀도 내가 너무 연락이 안되자 크게 화를 내는 일도 있었다. 나조차 날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난 교대 탈출을 결심했다. 1년만 더 버티면 임용에 몰두하고 고향으로 갈 수 있었지만, 그냥 이 안정적인 삶 자체가 싫었다. 꿈을 향해 달리던, 치열하게 살던 그때가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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